RPG는 어떤 게임인가? 이와 같은 질문을 생각하게 된 것은 “Game Architecture and Design“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 때문이다.
“필자는 RPG를 독자적인 장르라고 보지 않는다. 모든 RPG는 던전 앤 드래곤에서 빌어온 소재를 액션 어드벤처 게임 형식으로 바꾸고, 거기에 환상 세계의 경험이라는 시뮬레이션적 요소를 가미한 것이다.” – Game Architecture and Design 1권 21페이지
RPG를 독자적인 장르로 인정하지 못하겠다니, 무슨 소리일가? RPG는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 가장 인기 있는 게임 장르이다. 그렇다면 RPG는 어떤 게임인가? 사전적으로 RPG는 Role Playing Game이라 정의되며, 일반적으로 역할 수행 게임이라고 번역된다. 이는 현재 RPG게임의 원조가 Dungeon and Dragons같은 TRPG게임이기 때문이다. TRPG게임은 여러 사람이 한 자리에 둘러 앉아, 자신의 캐릭터를 정하고, 던젼 마스터가 제시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캐릭터에 적합한 연기를 하면서 다양한 문제를 해결해 나가고, 이야기를 나누는 게임이다. 이러한 TRPG의 게임 플레이는 그 사전적인 정의, 그 자체이다.
여기에서 컴퓨터 기술이 도입되어 RPG가 탄생하였다. 최초의 RPG는 TRPG를 혼자 플레이 할 수 있도록 만든 것으로 시작되었다. 마스터 대신 게임 제작자가 미리 만들어 놓은 상황 속에서 컴퓨터를 상대로 게임을 진행해 나갈 수 있다. RPG는 여러 가지 방향으로 지속적으로 발전하면서 변화하였다.
그러한 변화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캐릭터”이다. 초기의 RPG는 유저가 플레이 하는 캐릭터가 시나리오와 큰 관계가 없었다. 초기의 RPG에서 플레이어는 자신이 마음에 드는 캐릭터를 만들어 게임을 진행할 수 있으며, 어떠한 캐릭터가 만들어 지던지 시나리오는 변함없이 일정하다.
하지만, 많은 RPG가 보다 심도 있는 시나리오를 전하는 게임으로 발전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캐릭터를 사전에 정의하여 유저에게 제공해주게 되었다.
대표적인 RPG게임인 파이날 판타지는 시리즈를 거듭하면서 점차 캐릭터가 구체적이 되어 간다. 처음에는 4명의 빛의 전사, 크리스탈에게 선택받은 4명의 고아등의 캐릭터가 주인공이었다. 하지만 시리즈가 발전하면서, 캐릭터들은 점차 멋지고 개성 있고, 이야기가 있는 캐릭터들로 바뀌어 갔다.
또한, 시나리오의 강조가 행동의 자유도를 제약하였다. 현재 대부분의 RPG는 단방향의 시나리오를 따라간다. 시나리오가 깊고, 길수록, 유저의 행동에 따르는 변화를 반영하기 힘들어 진 것이다.
결국, RPG는 자신의 캐릭터를 설정하고 상황 상황에 맞게 그 캐릭터에 맞는 역할을 연기하는 게임에서, 사전에 제시된 캐릭터로 제시된 이야기를 따라가는 게임으로 바뀌었다.
“Game Design : Art and business” 에서는 RPG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롤 플레잉 게임에서 게이머는 보통 한 그룹의 영웅을 조종해서 퀘스트를 해결해 나가며 영웅의 능력과 힘을 성장시키는 것을 반복한다.” – 게임 디자인 : 아트& 비지니스 10p
이 한 문장이 RPG의 정의를 명확히 해주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토대로, RPG의 핵심적인 요소를 정리해본다.
1. 캐릭터와 성장
RPG에서 캐릭터는 아주 중요하다. 처음부터 영웅은 아니지만, 영웅의 자질을 가지고 있다. 많은 RPG에서 여러 명의 캐릭터가 주인공의 동료로 등장하게 되며, 플레이어는 주인공 캐릭터와 그 동료 중 일부를 조종하게 된다.
캐릭터들은 처음에는 무척 약하지만, 모험을 해 나가면서 지속적으로 성장하여 강력한 영웅이 된다.
RPG에서 캐릭터에 대한 애착은 다른 어떤 게임보다 크다.
RPG에서 동료의 죽음은 플레이어에게 엄청난 슬픔과 상실감을 안겨준다. 파이날 판타지 7을 해본 사람이라면, 거의 모두 에어리스의 죽음에 슬퍼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스타크래프트에서 매딕이 죽었다고 슬퍼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이러한 애착의 근원 중 가장 커다란 것은 캐릭터의 성장이다. 수십 시간 동안 성장시켜 온 캐릭터는 더 이상 시스템에서 제공해 주는 단순한 캐릭터가 아니다. “게임의 마지막에서 캐릭터는 디자이너와 플레이어에 의해서 독특하게 혼합된 창조물이 될 것이다. 다른 어떤 장르도 스크린 안에서 스토리를 진행하는 캐릭터에게 이만큼의 개인적인 애착을 갖게 하지 않는다.” – 게임 디자인 : 아트& 비지니스 52p
2. 시나리오(퀘스트)
RPG에서 시나리오를 빼 놓을 수 없다. 플레이어가 조종하는 영웅의 앞에는 숙명적으로 따라야 할 이야기와 시련, 시험이 존재하며, 이러한 것들을 통과하며 영웅은 성장해 나간다. RPG의 시나리오는 상상할 수 없이 다양하며 플레이어에게 감동을 선사해 준다.
물론, RPG이외에도 시나리오가 중요하고 매력적인 장르가 존재한다. 대표적인 시나리오 게임인 “어드벤처“가 그 대표적인 예 이며, 최근에는 많은 액션 게임들도 RPG못지 않은 멋진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RPG는 다른 장르가 넘볼 수 없는 시나리오에 대한 몰입감과 감정 이입을 가지고 있다. 이는 시나리오 한 가운데 서있는 캐릭터에 대한 애착의 정도가 다른 게임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강하기 때문이다.
3. 전투(해결)
RPG에서 갈등은 대부분 전투를 통해 해결을 한다. 전투가 없다면 캐릭터를 성장시킬 필요도 없을 것이다.
전투는 RPG를 액션 게임이나, 어드벤처 게임과 구분 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어드벤처 게임의 경우 문제를 전투로 해결하지 않는다. 대부분 직접 / 간접적인 퍼즐을 푸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해 난다. 전투는 RPG와 액션이 갈등 해결법이다.
그렇다면, RPG에서 발전해 나온 MMORPG는 어떤 특징이 있는 것일까?
MMORPG는 기본적인 정의는 RPG의 온라인, 멀티 플레이어 버전이다. 그리고 RPG와는 많은 차이가 존재한다. 그것은 TRPG가 RPG로 바뀌면서 엄청난 변화가 생긴 것 과 같다. MMORPG에는 RPG에는 없던 새로운 특징, RPG보다 강하게 표현되는 요소, 그리고 제약되거나 더 이상 표현되지 않는 요소가 존재한다.
RPG에는 없는 새로운 특징
MMORPG의 세계는 RPG의 세계보다 방대하고, 자세하다. RPG였다면 표현하지 않고 넘어갈 수많은 것들이 MMORPG에는 잘 표현되어 있다. RPG의 세계를 놀이동산이라고 한다면 MMORPG의 가상 세계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특히, MMORPG에는 RPG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시장 경제가 존재한다. 많은 유저가 동일한 세계에 존재하며, 재화와 화폐가 존재하며, 상호 교환이 가능하고, 재화에 희소성이 존재한다. 시장 경제가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요건이 갖추어 져 있다. 때문에 MMORPG의 세계에서는 더 많은 것을 고려해야 한다. 일부 아이템에 희소성을 부여해야 하며,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여 유저들의 게임 플레이의 성과중 하나인 재화의 가치가 급격하게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유통 화폐량을 적절히 조절할 장치도 마련해야 한다. 거래 관련 정책도 잘 생각해서 정해야 한다.
게다가, MMORPG는 RPG에서는 사라져버린 자유도가 존재한다. 유저가 언제, 어느 곳으로 갈지, 누구와 함께 무엇을 할지 예측하기 힘들다. 때문에 세계는 그만큼 철저해야 한다. 게임 월드의 다양한 장치들은 어떠한 상황이 닥치더라도 오작동 없이 작동해야 하며, 제작자의 의도에 부합해야 하며, 유저들이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RPG 보다 강화된 것들
1. 캐릭터의 성장 + 캐릭터간 균형
MMORPG는 RPG보다 더 다양하게 성장시킬 수 있다. 선택의 폭이 더 넓으며, 심도도 더 깊다. 레벨, 스킬, 아이템들 다양한 방법으로 캐릭터를 성장시킬 수 있으며, 그 한계가 무척 높다.
높은 자유도를 가지는 MMORPG는 언제 어떤 레벨의 캐릭터가 어떤 아이템을 장비하고 어떤 스킬을 사용하여 어떤 몬스터와 싸울지 모르기 때문에, 밸런스에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 특히 RPG에선 큰 의미가 없는 전투 속도 역시 고려해야 한다. 다른 플레이어와 간접적인 비교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캐릭터와 PvP를 통해 캐릭터의 성장 정도를 직접 비교해 볼 수도 있다. 밸런스가 잘 맞지 않을 때, RPG는 “좋지 않은 게임” 정도가 되만, MMORPG는 “못할 게임” 이 되어버린다.
2. 스토리
MMORPG가 되면서 스토리의 표현이 강해졌다는 예는 아직 본 적이 없다. 유저의 참여에 따라 생성되고 변화하는 스토리에 대한 연구와 시도가 있기는 하지만 의미 있는 결과가 나온 예는 없다.
3. 전투
다른 유저와 싸우거나, 다른 유저와 힘을 합쳐 전투를 해 나갈 수 있다는 특징이 존재한다. 두 가지 모두 다른 장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고유한 재미 요소이다.
RPG보다 표현이 제약된 것들
1. 캐릭터
RPG에서 플레이어가 조종하는 캐릭터는 영웅이다. 하지만 MMORPG에서는 영웅이 아니다.
– 스타워즈 RPG에서 플레이어가 루크 스카이워커를 조종했다면, 스타워즈 MMORPG에서 플레이어가 조종하게 되는 캐릭터는 클론 병사 중 한명일뿐이다. 이것은 플레이어가 게임을 대하는 관점과 시나리오적 표현에 큰 영향을 미친다.
2. 스토리
MMORPG에서는 세계를 다른 플레이어와 공유해야 하며,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시간을 보내야 한다. 마왕을 죽인다 하더라도, 세상에 평화가 오기는커녕, 잠시 후 다시 마왕이 부활을 하게 된다. 때문에 스토리 표현에 엄청난 제약이 생긴다.
RPG의 스토리를 100이라고 한다면, MMORPG에서 표현될 수 있는 스토리는 0.01정도에 불과하다.
3. 전투
MMORPG의 세계는 연속적이다. 전투에 있어서도 이 규칙은 적용된다. 즉, 전투 공간이 독립적이지 않다.
독립되지 않은 전투 공간은 연출적인 면, 시간적인 면에서 많은 제약을 준다.
이와 같은 내용을 정리해 본다면, MMORPG의 주요한 특징은 “보다 실제적인 환상 세계(혹은 SF세계나 기타 등등 세계)에서 캐릭터를 성장시키고 전투에 가장 적절한 형태로 만들며, 다른 유저와 함께 혹은 다른 유저와 싸우는 것“ 이라고 결론낼 수 있다.
실제로, MMORPG를 하는 유저들의 주요 관심사는 다음과 같다.
“어떻게 하면 캐릭터를 보다 빠르게, 잘 성장시킬 수 있으며, 보다 빠르게 사냥을 하고, 보다 강한 적과 싸워 이길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능력치와 스킬과 아이템을 세팅했을 때 최적화된 성능을 내어 상대방을 보다 쉽게 제압할 수 있는가?”
이러한 유저들의 관심사는 위에서 정리한 MMORPG의 주요 특징과 일치한다.
여기서 한가지 재미있는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위에서 정리한 MMORPG의 특징은 시뮬레이션 게임이 추구하는 특징과 상당히 일치한다. MMORPG를 “가상 세계 체험 + 캐릭터 성장, 최적화. 그리고 그 결과를 검증할 수 있는 전투 시뮬레이션” 이라고 정의해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이렇게 정의하는 것은 처음 화두가 된 Game Architecture and Design의 내용으로 돌아가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이것은 조금 극단적인 정의이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봄으로서 게임을 바라보는 한가지 관점을 늘리고, 새로운 재미를 찾을 수 있다면 이러한 극단적인 정의도 나름대로의 가치를 가지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