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회고 시기는 2007.2~2008.8 기간으로는 1년 반 정도이다. 팀 이름은 블루 팀이며 회사는 전과 동일한 엔트리브 소프트이다. 여러모로 전과 다른 프로젝트였다. 이 때의 경험은 개인적 성장의 큰 밑거름이 되었다. 안타깝게도 게임은 완성되지 못했으며, 공개된 적도 없다.
프로젝트 블루
블루 팀의 게임은 엔트리브 소프트가 보유하고 있는, 한국의 많은 올드 게이머가 향수를 느낄 수 있는 고전 게임 IP를 이용한 게임이었다. 그 제목 조차 다른 게임의 형태로 나마 한번 공개된 적 있었다. …요즘의 한국 게임 시장을 생각해보면 어디서 IP든 제목이든 ‘예토전생’할 지 모르니… 이하 블루팀의 프로젝트, ‘프로젝트 블루’로 부르겠다.
어떤 게임이었나?
프로젝트 블루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검과 마법의 판타지를 소재로 하며, 플레이어들이 작은 규모로 모여 각자의 직업에 맞는 행동을 하며 협력하여 적들과 싸우는 게임이다. 확정되지 않은 게임성과 IP를 의식한 추상화가 합쳐지니 어느 게임의 소개로 써도 될만한 설명이 되어버렸다…
정확히 언제 개발이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2007년 참여 시점에 프로토타입 단계는 지난 상태였다고 기억한다. 멀티 플레이까지 가능한 서버-클라이언트가 구현된 상태였고, 주요 비주얼 애셋도 만들어진 상태였다. 키 피쳐가 담긴, 플레이 영상을 편집한 사내 홍보 영상까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게임의 비젼을 보여주고 개발 관점을 전달하는 효과적이고 멋진 수단이었다고 생각한다.
1인 게임 디자이너 팀
블루팀에 팀에 합류한지 얼마 되지 않아 그 동안 게임 디자인을 도맡아왔던 디랙터가 팀을 이탈했다. 그때부터 팀을 나오기 몇 달 전 까지, 팀에 게임 디자이너는 혼자였다. PM도 존재하지 않았다. 프로덕트 오너인 PD는 AD, TAD를 겸하고 있었다.
인지한 모든 일을 시도했다.
본인은 당시에 인지할 수 있었던 모든 일들을 하려 했다. 저 문장에는 복합적인 문제가 담겨 있다. 식견의 부족으로 인지하지 못했던 일도 있을 테고, 중요도나 우선순위 판단이 올바르게 되지 않았던 일도 있을 것이다. 한발 더 나가 해도 되는지, 할 수는 있는지에 대한 판단 또한 부족했을 것이다. 적어도 인지를 하고 시도 안 했던 일은 없는 것 같지만, 인지 하지 못한 중요한 일을 노쳤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시기가 블로그를 열심히 적던 시기인지라, 그 시기의 글들을 보면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게임 디자인
설정부터 시스템, 레벨, UI 디자인 까지 게임 디자인의 모든 부분을 수행했다. 아, 퀘스트는 없었는지 한 기억이 없다. 생전 해본 적 없는 영역이 많았다. 지금의 시점으로 보면 다른 분야보다 이곳에 집중했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당시에는 다른 문제가 더 크다고 판단한 듯 하다.
개발 관리
어떻게 하면 프로덕션을 잘 할 것인가? 에서 시작해서, 일정, 개발 방법론, PD와 디랙터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사람인가 까지. 개발관리는 블루팀에 있을 때 가장 많이 신경이 쓰이고 생각을 많이 한 분야이다. 당시에 작성했던 글들을 살펴보면 애자일 개발 방법론, 권력이나 영향력등이 있었고, 읽은 책들도 프로젝트 관리의 기술이나 리더십 관련등이 포함되어 있다. 뭐 하나 제대로 배웠냐 하면 그런 것은 없지만 인식했다는 것 만으로도 한 걸음 내딛은게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팀빌딩 프로그램 기획
개인적으로 워크샵이라면 질색을 하는데,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블루팀의 워크샵부터였을지도 모른다. 첨부터 그렇게 싫어하진 않았으니..) 이때는 어떤 정신으로 워크샵의 기획부터 준비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그때를 기록한 문서의 부제를 ‘Save blue from blue’ 라고 적은 것으로 보아, 거의 마지막 희망을 잡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라고 생각해 본다.
채용 업무
엔트리브의 면접에는 교차 검증을 위해 ‘1차 실무 면접 때는 최소한 2팀 이상이 참여해야 한다.’ 라는 규칙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면접 품앗이 문화가 생겼다. 무척 많은 면접에 참여하였고 짧은 기간에 많은 경험을 얻었다. 구직에 대한 글도 이때 작성했다.
팀 내외의 크고 작은 프리젠테이션
준비와 프리젠테이션 진행 모두 좋은 경험이 되었다.
다양한 교류
엔트리브는 이벤트가 많았다. 사내 기획 노하우 공유 세미나 라던가 (한번 밖에 못해본 것 같지만) 패널 토론 (프로젝트별로 한 명씩 대표로 패널이 되어 주제에 대해 자신의 프로젝트는 어떻게 풀었는가를 소개하고 토론하기. 이것도 한번, 패널로 참석했다. 근무 기간이 길지 않아서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계속 되었다면 NDC같은게 되지 않았을까?) 등등을 통해 다른 팀의 게임디자이너들과 교류를 시작하게 되었고, 뒤에 언급할 기획자 소모임 등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외에도 이 시기에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다.
신문물 습득
구글앱스, 애자일, 마인드맵, 츤데레 등, 새로운 것들을 많이 접하고 익숙해졌다.
기타 잡무
팀 홈페이지와 게시판 설정과 관리라던가… 생각해 보니 참 잡다했다.
그리고 많은게 없었다…
처음에는 꽤 의욕적이고 신났다고 기억한다. 직전 트릭스터 프로젝트를 그만둔 계기인, 경직된 환경, 제한된 자원, 반복적인 업무등과는 180도 달랐으니 말이다. 물론 마냥 좋은 것은 아니었다. 트릭스터땐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사실 너무 당연해서 생각도 못했던) 많은 것들이 당연하단 듯 없기도 했기 때문이다.
무엇이 없었나? : 경험(개념)과 능력
돌이켜보면 “어떻게 저걸 다 했을까?” 라는 생각이 아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경험도 지식도 부족한 저 일들을 다 할 생각을 했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프로토타입이 끝나고 프로덕션에 들어간다는 시점에서 누가 하라고 해도 안 된다고 해야 할 게임의 근간에 해당하는 몇 가지를 바꾸었다. 시점이라거나, 조작이라거나… 물론 독단은 아니었고… PD와 코드가 맞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냥 그렇게 해선 안될 변경이었다. 프로토타이핑을 다시 한다는 선언과 해도 된다는 확답을 받고 했어야 했다. 그 변경이 어떤 연쇄반응을 일으킬지 잘 예측하지 못했다고 밖에 할 수 없다. 물론 그렇다고 변경을 안 했으면 게임이 나왔겠냐… 그건 또 아니라고 본다. 프로토타입의 기획자가 팀을 나갔고, 그가 만들고자 한 게임의 명세와 추구하는 재미를 정확히 모르는 상황에서 그 유지를 이어 게임을 완성시킬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무엇이 없었나? : 기획팀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프로젝트에 게임 디자이너는 혼자였다. 디자이너가 혼자라는 것은 단순히 인력이 적다는 의미가 아니다. 게임 디자인을 하며 아이디어가 있을 때 의견을 물어볼 사람, 디자인된 내용을 검토해줄 사람, 생각하는 게임에 대해 설명을 해주고 피드백을 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팀에, 같은 게임을 만드는 다른 사람들이 있지만, 대체되기는 힘들다. 고민을 들어줄 수는 있겠지만, 함께 일에 맞닥뜨리고 여차하면 대신 해야 할 수도 있는 정도의 입장이 있는 사람과, 그로부터 한걸음 떨어져 있는 사람의 피드백이 같은 무게를 가질 수 있을까?
만약에 최소한 한 명이라도 게임 디자이너가 더 있어 팀을 이루었다면, 위의 문제 – 경험과 능력의 부족 – 가 심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변경을 하지 않았거나, 변경량을 줄였거나, 변경에 의한 영향력을 빠르게 예측하고 해결했거나, PD를 통해 경영진에게 알리고 일정을 확보했거나… 물론 다른 어떤 문제가 생겼을지 모르겠지만, 과거에 대한 가정은 이만 줄이겠다.
우연일까? 당시 엔트리브 소프트에는 비슷한 입장 – 신규 개발팀, 단일 게임 디자이너 – 에 처한 사람들이 몇 명 있었다. 우연이 아니라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근거가 없으므로 언급하지는 않겠다. 이들을 모아 신규 팀 기획자 소모임을 만들었는데 꽤 도움이 되었다. 장르와 소재가 모두 달랐지만, 새 게임을 만들고 게임 디자인을 혼자 고민한다는 점이 그 차이를 무마할 만큼 큰 의미가 되었다.
무엇이 없었나? : 비전?
이번 회고를 하며, 꽤 의외였던 것이 있다. 왜 본인은 프로젝트 블루를 나왔는가? 회고 전, 막연하던 기억에는 ‘비전의 부재’ 가 핵심 원인이었다. 하지만, 차근차근 회고를 하다 보니 그 기억이 맞는가? 라는 의심이 생겼다. 물론 비전의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것은 확실하다. 팀의 규모를 생각할 때 PvP와 PvE중 하나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PD는 잘 만든 액션이 둘을 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등의 차이가 있었고, 나는 이것을 문제라고 생각했다.
남아있는 기억에는 이러한 문제들이 좁혀지지 않는 것이 퇴사의 큰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했고, 오랫동안 프로젝트 블루 = 실현 불가능한 비전을 추구한 프로젝트. 라고 기억해왔다. 하지만, 그것은 원인의 일부였고 결정타는 아닌 것 같다. 결정타는 무엇이었을까? 결국엔 사람간의 문제라는 형태로 표출되었을 것이다. 이 부분은 공개된 문서에서 적을 문한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다루지 않겠다. 어떤 기억은 희미한 체로 놔두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한다.
돌이켜 봤을 때 아쉬움
돌이켜 보았을 때 정말 아쉬움이 많이 남는 프로젝트다. 과거의 일에 가정을 가지고 이야기 해야 무슨 소용이겠냐 만은, 당시에 훨씬 다양한 게임에 대한 식견과 팀의 규모와 능력을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능력과 그를 통해 도출한 결론을 설파할 수 있는 재량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구축한 액션의 재미가 가장 잘 나타날 수 있는 한가지를 짚고 나머지 곁 가지들을 잘라냈다면 같은 기간에 같은 인력으로 훨씬 재미있는 게임을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아쉬움이 크다.
끝 : 배운 점
생각하는 자가 성장할 수 있다.
Ps. 블루팀에 있는 동안 쓴 글 중, 부정적 피드백 이라는 글이 있다. 기억하는 블루팀은 정말 예의 바른 팀이었다. 저런 글을 쓰고 싶은 만큼. 아, 물론 구성원 개인 개인은 참 좋았다.
참 힘든 회고였습니다. 업무 경험은 크게 기억이 나는 것이 없고, 좋지 않은 기억도 많은 기간이었습니다. 뭐 하나 손에 잡히게 이룬 것도 없고, 좋게 이야기 해서 문제 의식, 고민, 질문이지, 불평불만 가득했던 시기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굳이 회고 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있었지만… 뭐 그래도 직시하려고 노력하니 두서 없게나마 나온 것 같습니다. 2편을 기다려 주신 철철마왕님과 “ㅂ”님에게 감사의 뜻을 품고 글을 마무리 합니다.
혹시라도, 잘못된 내용이 있다면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