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Have No Word & I Must Design – 말이 아닌, 디자인만이 게임을 말해 준다

원래 이 블로그는 직접 작성한 컨텐츠로만 채우려 했으나, 곁에 두고 늘 상기하고 싶은 정말 멋진 글이라 가지고 왔습니다.
1994년에 이런 멋진 글이 적혀졌다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가지고 온 곳은 GameWeek 블로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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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1994년 영국의 RPG잡지 Interactive Fantasy #2에 게재된 것입니다.



목차


* 우선 ‘게임’이란 무엇인가?
– ‘게임’은 퍼즐이 아니다
– ‘게임’은 완구가 아니다
– ‘게임’은 스토리가 아니다
– ‘게임’에는 참가자가 필요하다


* 그래서 ‘게임’이란 것은 결국 무엇인가?
– 의사결정
– 목표
– 장애물
– 자원 관리
– 게임 토큰
– 정보


* ‘게임’을 매력적인 것으로 만드는 다른 요소
– 상호 지원과 교섭
– 분위기
– 시뮬레이션
– 다채로운 전개
– 감정이입
– 롤플레이
– 플레이어간의 교류
– 극적인 클라이맥스


* 모든 게임은 주사위 아래서 형제이다


시작하면서


세상에는 다양한 게임이 있다. 그 종류라는 것은 방대한 것이다.
컴퓨터/CD-ROM/네트워크를 매체로 하는 게임, 아케이드 게임, 우편 게임, 전자 메일 게임, 여기저기에 범람하는 성인용 게임, 워 게임, 카드 게임, RPG, 라이브 액션 게임, 그 외.그렇지, 서바이벌 게임, 버추얼 리얼리티, 스포츠, 승마도 잊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것은 모두가 게임이다.


그런데 대체 이 모든 것에 공통되는 요소가 있는 것일까?
대체 ‘게임’이란 무엇일까?
‘좋은 게임’과 ‘나쁜 게임’을 어떻게 구분하면 되는 것일까?


마지막 질문부터 말하자면 ‘좋은 게임과 나쁜 게임을 구별한다’는 것은, 물론 누구나가 항상 하는 일이다.
승마로 장애물을 뛰어 넘었을 때, 보드 게임의 말을 뺏겼을 때, 귀중한 ‘대지의 정령’ 카드를 할 수 없이 넘겨줄 때, 보물을 남들에게도 분배해 주어야 할 때, 당신은 말한다. “좋은 게임이었네, 조”
그러나, 이것은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나서 “잘 썼구먼”하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야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좀더 잘 된 책을 쓰기 위해 쓸모가 있는 것도 아닌 것이다.


그런데 게임 디자이너는 게임을 평가하고, 게임을 이해하고, 그것이 어떻게 기능하고, 왜 재미있는가를 이해하기 위해 게임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게임이 놀랄만한 성장을 거듭하고 또한 기막힐 정도로 다채로운 형태를 취하고 있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는 새로운 분야이기에 낡은 수법으로 이것을 분석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므로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분석 기법이 요망된다.



게임을 분석하는 수법에 대해서


* 우선 ‘게임’이란 무엇인가?


– ‘게임’은 퍼즐이 아니다
크로포드(Chris Crawford)는 그의 저서 ‘컴퓨터 게임 디자인 기법(The Art of Computer Game Design)’에서 그가 일컫는 ‘게임’과 ‘퍼즐’을 비교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퍼즐은 정적이다.
퍼즐이 제공하는 것은 논리적인 구조이다. ‘플레이어’는 단서를 가지고서 이 구조를 해결하고자 한다.
이에 대하여 ‘게임’은 정적이지 않다. 게임은 플레이어의 행동에 의해 변화한다.


게임이 아닌 것이 명백한 퍼즐도 있다. 예를 들면 아무도 크로스워드 퍼즐을 ‘게임’이라고는 부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크로포드에 의하면 세상에서 ‘게임’이라고 불리고 있는 것 중에서 실제로는 ‘퍼즐’에 지나지 않는 것이 있다고 한다.
레블링(Lebling)과 블랭크(Blank)의 ‘조크(Zork)’를 살펴보자. 이 컴퓨터 어드벤처 게임의 목표는 결국 퍼즐을 푸는 것이다. ‘조크’에 있어서 플레이어는 아이템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올바로 사용해서 프로그램의 상태를 원하는 대로 변화시키고자 한다. 거기에는 경쟁상대는 없으며, 롤플레이도 없고, 관리해야할 자원도 없다. ‘조크’에 있어서의 ‘승리’는 퍼즐 풀이의 결과일 따름이다.


물론 ‘조크’가 완전히 정적이지 않다는 것도 사실이다. 캐릭터는 여기저기로 이동할 수 있고, 취할 수 있는 행동은 장소에 따라 달라지며, 행동의 결과에 따라 소지품이 변화한다.
그러니까 단순히 게임이냐 퍼즐이냐가 아니고 비율을 고려할 필요가 생긴다.
크로스워드 퍼즐은 100% 퍼즐이지만 ‘조크’는 90% 퍼즐이고 10%만 게임이다, 하는 식으로.


실제로 대부분의 게임이 많든 적든 퍼즐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순수한 군사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에서조차도, 플레이어는 ‘특정한 유니트들을 사용해서, 한 지점에 최선의 공격을 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퍼즐을 풀어야 한다.
게임에서 퍼즐의 요소를 완전히 제거한다면, 거의 ‘탐험’만을 행할 뿐인 게임이 나올 것이다.
이런 것으로 CD-ROM판 ‘할머니랑 나랑(Grandma and Me)’을 꼽을 수 있다. 이것은 이른바 ‘인터랙티브 그림책’이라는 것으로 게임과 비슷한 의사결정이나 탐험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즉, 화면의 여기저기를 클릭해 보면, 재미있는 소리나 움직임을 불러일으킬 수가 있다. 그러나 사실상 ‘해결’해야할 과제는 아무것도 없고, 하물며 전술은 생각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퍼즐’은 정적인 것이며, ‘게임’은 인터랙티브한 것이다.


– ‘게임’은 완구가 아니다
‘심시티(Sim City)’의 디자이너인 라이트(Will Wright)에 의하면 ‘심시티’는 ‘게임’이 아닌 ‘완구’라고 한다.
그는 진짜보다도 더욱 반짝이는 가상적인 장난감 공을 만들어낸 셈이다.
이 공은 기묘하게 움직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볼 수 있다. 벽에 부딪쳐 튀길 수도 있고, 돌리거나, 던지거나, 드리블할 수도 있다.
그리고 바란다면 이 공으로 ‘게임’을 할 수도 있다. 축구든 농구든 간에 무엇이건 가능하다.
그러나 공 그 자체는 게임의 요소를 갖고 있지 않다. 플레이어간에 정해진 약속의 집합이 게임이며, 공은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 사용되는 완구에 지나지 않는다.


‘심시티’도 그렇다. 그와 비슷한 컴퓨터 게임과 마찬가지로 ‘심시티’는 플레이어가 조작할 수 있는 가상세계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진짜 게임과는 달리, ‘목표’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아, 물론 플레이어가 스스로 목표를 정할 수는 있다. ‘슬럼가를 일소한다’와 같이. 그러나 ‘심시티’ 그 자체에 승리조건은 없으며, 따라서 목표도 없다.
이것은 소프트웨어 완구인 것이다.


‘완구’도 인터랙티브하지만, ‘게임’은 그에 더해 ‘목표’를 가진다.


– ‘게임’은 스토리가 아니다.
게임에 관련된 이야기를 할 때, ‘스토리’가 화제로 떠오르는 경우는 대단히 많다. 무슨 인터랙티브 소설의 스토리가 어쨌다느니, RPG 플레이의 스토리가 이랬다느니 등등. 게임 디자이너에게 있어서, 게임이 스토리와 관계가 있다는 견해는, 머릿속에서 지워버릴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의 상상력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정말 그런 것일까. 적어도 이 점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스토리는 본래 직선적인 것이다.
등장인물이 어려운 선택에 직면하여, 고뇌 끝에 결단을 내리는 장면이 있다고 하자. 그러나 그 결단은 독자가 몇 번 스토리를 다시 읽어도 똑같으며, 그에 따라 발생하는 결과 또한 변하지 않는다.
혹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스토리는 그야말로 직선적이기 때문에, 사람을 감동시키는 힘을 갖는다고.
저자는 면밀하게 등장인물을 선택한 후, 사건을 일으키고, 결단을 내리게 해서 결말을 준비한다. 그렇기 때문에 만들어진 스토리는 가능한 선택 중에서 가장 감동적인 것이 된다.
만약 등장인물이 이와 다르게 행동한다면, 아마도 그로 인해 만들어지는 스토리는 보다 시시한 것이 될 것이다.


이에 비해 게임은 애초부터 직선적인 것이 아니다.
게임은 의사결정에 의존하는데, 이때 주어지는 선택은, 어느 것이든 그럴듯한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즉 ‘정답’이 하나밖에 없고 그것을 선택하는 외에 길이 없음이 명백하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의사결정이라고 부를 수 없다.
플레이어가 게임의 어떤 국면에서 특정한 선택 A를 골랐는데, 다음 번에 그 게임을 플레이했을 때는 선택 B를 골랐다고 했을 때, 합리적으로 생각해서 양쪽 다 온당한 선택이 될 수 있어야 게임다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게임을 스토리에 근접시키면 근접시킬수록, 그것은 보다 직선적인 것이 되어가고, 진정한 의사결정은 줄어들게 된다. 결국 게임과는 다른 것이 되어 가는 것이다.


잠시 생각해 보자.
당신이 책을 사거나, 영화를 보는 것은 멋진 스토리에 감동 받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RPG를 플레이하고 있을 때, 게임 마스터가 “그런 행동을 하면 안돼. 멋진 스토리가 엉망이 되잖아”하고 말한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게임 마스터의 이런 발언 자체는 틀리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니다. 게임은 스토리를 설법하는(storytelling) 것이 <결코> 아니다.


물론, 게임은 흔히 소설에서 소재를 빌려 오고, 그 때문에 성공하는 수도 많다. RPG는 소설적인 인물에 크게 의존하고, 컴퓨터 어드벤처 게임이나 LARP(Live Action Role-Playing)는 자주 영화적인 플롯을 따라가는 형태로 진행된다. 게다가 정해진 결말이 있는 게임일 경우, 소설이나 영화 같은 드라마틱한 클라이맥스를 노리고 싶어지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름다운 스토리를 따라 전개될 수밖에 없도록 게임에 지나치게 손을 대어버리면, 플레이어의 행동의 자유나 제대로 된 의사결정을 행할 능력을 심각하게 제한해 버리게 된다.


이야기는 좀 달라지지만,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하이퍼 텍스트’라는 새로운 소설의 동향은 매우 흥미롭다.


(역주) 여기서말하는 ‘하이퍼 텍스트’라는 것은 독자의 선택에 의해 플롯이나 결말이 변하는 인터랙티브 소설을 말한다. 이른바 ‘어드벤처 게임 북’도 그 일종.


본질적으로 하이퍼 텍스트는 직선적이지 않다. 따라서 종래의 소설 작법은 하이퍼 텍스트를 만드는데 있어 전혀 쓸데가 없다.
하이퍼 텍스트의 저자도 전통적인 소설의 작가와 마찬가지로 인간 실존의 본질을 탐구하려고 하지만, 독자가 여러 가지 시점을 고르고, 시간을 뛰어넘고, 이야기의 흐름을 구성하도록 허용한다. 그가 하는 작업은 전통적인 작가가 하는 일과 게임 디자이너의 일을 합쳐놓은 것과도 같지만, 스스로 인식하는 것 이상으로 게임 디자이너와의 공통점이 많은 듯 하다.
하여간에 만일 하이퍼 텍스트 소설이 예술의 경지에 도달한다면(하기야 내가 읽은 한에서 말하자면 그런 수준의 작품은 하나도 없었지만), 그것은 새로운 서술수법, 이미 ‘스토리’라고 부를 수 없는 무언가 다른 것을 만들어 낼 것이 틀림없다.


‘스토리’는 직선적인 것이다. ‘게임’은 그렇지 않다.


– ‘게임’에는 참가자가 필요하다.
전통적인 예술형태에 있어서청중은 수동적 입장에 놓인다.
예를 들어 그림을 감상하는 경우를 생각하자. 관객은 그려진 것을 마음속에 떠올릴 수 있겠고, 경우에 따라서는 화가가 의도하지 않았던 것까지 잡아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림 감상에 있어서 관객의 역할은 아주 적다. 화가가 그리고, 관객은 볼뿐이다. 관객은 수동적인 입장에 놓여있다.


영화, TV, 연극에 있어서도 동일하다. 관객은 앉아서 작품을 감상한다. 그림의 경우처럼 어느 정도까지는 관객이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관객은 결국 관객이며, 수동적 입장임에는 변함이 없다. 작품은 관객과는 다른 사람이 제작한 것이다.


독서의 경우, 이야기의 각 장면은 종이 위에서가 아니라 독자의 머리 속에서 전개된다. 그러나 결국 독자는 작가의 문장을 읽고 있을 뿐이며, 역시 수동적인 입장에 놓여있다.


이러한 전통적인 예술형태의 개념, 즉 ‘위대한 예술가가, 황송하옵게도 그 재능의 한 조각을 무지몽매한 대중에게 하사하신다’는 발상은 너무나도 독재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혁명 후 200년이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이렇게 귀족적인 형태로밖에 예술작품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일까.
지금 우리는 시대 정신을 반영하는 예술형태를 꼭 필요로 한다. 보통 사람 스스로 예술적 체험을 창조할 수 있게 하는, 그런 것을.


이 정도로 해두고, 게임 이야기로 돌아가자.
게임은 한 벌의 규칙을 제공한다. 그리고 플레이어가 그것들을 사용하여 자기 자신의 결과를 창조하여 간다. 이것은 John Cage의 음악과도 비슷하다. 그는 완전한 악보가 아닌, 테마만을 작곡한다. 연주자는 이 테마를 가지고 즉흥적으로 연주해야만 한다.
게임도 마찬가지다. 게임 디자이너는 테마를 제공하고, 플레이는 플레이어가 한다.


이것이야말로 민주주의 시대에 어울리는 민주적인 예술형태가 아닐까.


전통적인 예술형태는 수동적인 청중에 대해 주어진다. 게임은 적극적인 참가자를 요구한다.


* 그래서 ‘게임’이란 것은 결국 무엇인가?



게임이란 예술의 한 형태로, 플레이어라고 불리는 참가자가 목표달성을 위해서 게임 토큰을 통해 자원관리를 위한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다.
이 정의에 대해 하나하나 살펴보자.


– 의사결정
우선, 요즘 요란 법석하게 떠들고 있는 어리석은 ‘인터랙티브(interactive: 상호작용하는)’라는 말을 ‘의사결정’이라는 용어로 격파하고자 한다.
“이제부터는 인터랙티브의 시대이다”어쩌고 하는 말을 여러 번 들었을 것이다. 이런 공허한 말과 “이제부터는 프누글비쯔의 시대다”하고 대충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 것과 뭐가 다른 것일까. 계몽적이라는 점에서는 그놈이 그놈이다.


인터랙티브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전등 스위치를 생각해보면 된다.
스위치를 올리면 전등이 들어온다. 스위치를 내리면 전등이 꺼진다. 오오, 인터랙티브하다. 하지만 이게 재미있는가.


모든 게임은 인터랙티브하다. 즉 게임의 상황은 플레이어의 행동에 따라 달라진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게임이 아니고 퍼즐일 것이다.


그러나,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말인가.인터랙티브 그것 자체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 인터랙션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목표’가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여기에 인터랙티브한 작품이 있다고 치자. 이것을 플레이하고 있을 때, A나 B 둘 중에 한쪽의 행동을 선택해야만 하게 되었다.


A를 선택한다고 하면, A가 B보다 좋은 이유는 무엇일까. 혹은 언제는 A가 좋고, 또 언제는 B가 좋은 것일까. 의사결정을 위해 무엇을 고려해야 할까.
관리해야 할 자원은 무엇일까. 최종적인 목표는 무엇일까……


보라, 아무도’인터랙티브’따위는 문제삼지 않는다. 고려할 가치가 있는 것은 ‘의사결정’이라는 문제인 것이다.


의사결정의 필요성이야말로 게임의 본질이다.


‘체스’를 생각해보자. ‘체스’에는 일반적으로 게임을 매력적인 것으로 만드는 요소가 거의 포함되어 있지 않다. 거기에는 시뮬레이션도, 롤플레이도, 분위기를 돋구는 여러 가지 소도구도 없다. 있는 것은 의사결정의 필요성뿐이다. ‘체스’의 규칙은 명확한 목표를 주고, 몇 수 앞을 내다보지 못하면 이길 수 없도록 극히 정교하게 짜여 있다. ‘체스’가 게임으로서 성공한 것은 오로지 의사결정의 요소가 탁월하기 때문인 것이다.


게임에서 플레이어가 하게 되는 일은 무엇일까.
일차적으로 답은 게임을 즐기는 수단에 따라 다르다. 주사위를 굴리거나, 다른 멤버와 교섭하거나. 키보드를 두들기는 등. 그러나 모든 게임에 공통되는 본질적인 대답은 ‘의사결정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플레이어는 언제나 게임의 상황을 검토한다. 게임의 상황은 화면에 나타날 수도 있고, 게임 마스터가 설명해주기도 하며, 보드 위의 말이 배치된 형상으로 주어지기도 하다.
다음으로 플레이어는 최종적인 목표, 게임 토큰, 가질 수 있는 자원들을 염두에 두고서, 장애물을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를 생각한다. 그리고서 가능한 한 최선의 수를 쓰고자 한다.


그리고 의사결정을 한다.


여기서 핵심은 목표, 장애물, 자원관리, 정보 등의 요소이다. 이제부터 이들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다.


게임을 분석할 때는 ‘이 게임에서는 어떠한 의사결정이 요구되고 있는가’라는 것을 생각해야만 한다.


– 목표
‘심시티’에는 목표가 없다. 그렇다면 이것은 게임이 아닌 것일까.
물론이다. 디자이너 자신이 말하듯이 이것은 게임이 아닌 완구이다.


‘심시티’를 오랫동안 즐기기 위해서는 스스로 목표를 정해서 이것을 게임화해야만 한다. 그 목표가 가능한 한 최대의 메가로폴리스를 만드는 것이든, 시민의 지지율을 최대로 끌어올리는 것이든, 운수업만으로 이루어진 도시를 만드는 것이건 간에, 하여간 목표를 정할 때 비로소 ‘심시티’는 게임으로 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소프트웨어는 플레이어 자신이 결정한 목표를 지원해주도록 되어 있지 않다. 특정한 목표를 염두에 두고 디자인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디자이너가 상정하지 않은 방식으로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면, 극히 짜증나는 경우에 마주치게 되는 일이 빈번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목표가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심시티’는 금새 질려버린다.
이와 대조적으로 메이어(Sid Meier)와 셜리(Bruce Shelly)의 ‘시빌라이제이션(Civilization)’은 분명히 심시티에서 파생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명확한 목표가 있기 때문에 플레이어는 ‘심시티’보다 훨씬 열중할 수 있고,빠져들게 된다.


‘(게임에 있어서 목표가 중요하다고 한다면) RPG는 어떤가. RPG에 승리조건 따위는 없지 않은가’라는 반론이 나올지도 모른다.


사실 RPG에는 승리조건이 없다. 그러나 RPG에도 틀림없이 목표가 있다.
어디서나 등장하는 ‘경험치 벌기’라든지, 친절한 게임마스터가 강제로 밀어붙여준 퀘스트를 달성한다든지, 제국을 재건해서 항성간 문명의 붕괴를 막는다든지,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든지, 뭐, 그런 것이다.
만일 무언가의 사정으로 목표가 없었다고 쳐도, PC는 금새 적당한 목표를 찾아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PC는 술집에서 “이 얼마나 재미없는 게임이냐”하고 투덜투덜 거리며 불평을 해대는 것 정도 말고는 할 일이 없어진다. 그렇게 되면 게임 마스터도 화가 나서, 갑자기 술집에다 오크의 대군을 투입해서 그 PC를 두들겨 패주려고 할 것이 틀림없다.


오, 좋다. 이제 목표가 생겼다. 어쨌든 살아남는다는 건 훌륭한 목표다.
최대의 목표라고 해도 좋다.


하여간 목표가 없으면 의사결정은 무의미해진다. A도 B도 같은 것. 아무거나 하나 찍어라. 뭘 걱정하나?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어느 쪽을 선택하는가가 차이를 갖기 위해서는, 즉 게임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무언가 성취하기 위해 노력할 대상, 목표가 필요한 것이다.


게임을 분석할 경우 ‘이 게임의 목표는 무엇인가. 목표는 단일한가. 복수의 목표가 있다면, 각 플레이어가 그 중에서 자신의 목표를 선택하고, 목표 성취를 위해 매진하도록 만드는 장치는 무엇인가’라는 것을 생각해야만 한다.


– 장애물
이른바 ‘정치적으로 올바른’ 발언을 해보자.
예로부터 ‘게임’이란 사악한 것은 너무나도 경쟁심을 부추긴다. 아이들에게는 보다 협동심을 키울 수 있는 놀이를 주어야한다. 박수, 박수, 경청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협력적인 놀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자 여러분, 함께 공을 던져봅시다’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오오, 이 얼마나 매혹적인가. 이봐, 자네. ‘모탈 컴뱃(Mortal Kombat)’같은걸 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역주) ‘정치적으로 올바른’ (Politically Collect)
1980년대부터 미국에서 시작된 ‘차별이나 편견에 기반한 표현이나, 소수민족에게 불쾌감을 주는 표현을 규제하자’는 운동에 따른 표현 혹은 발언을 가리킨다.
(역주) ‘모탈 컴뱃’
잔혹한 살육을 즐기는 컴퓨터 게임


그건 그렇고, 게임에 있어서 ‘경쟁’이라는 요소는 중요한 것일까.
대답은 ‘그렇다’, 혹은 ‘아니다’ 어느 쪽일 수도 있다. 머리를 써서 다른 플레이어를 때려눕히는데 기쁨을 느끼는 사람은 많다. 특히 ‘체스’의 플레이어는 그야말로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결코 나쁜 일은 아니다.
적어도 주먹을 써서 상대를 때려눕히는데 기쁨을 느끼는 것보다야 낫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게임의 진짜 재미는 ‘경쟁’에 있다기보다는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분투’하는데 있다.


여기서 내가 디자인한 게임을 선보이고자 한다. 이름은 ‘소영제국(小英帝國)’. 제 2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 함락후의 영국을 다룬 역사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당신의 목표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켜내고, 사악한 압제자를 쳐부수는 것이다.


행동을 선택하십시오.
A. 항복한다.
B. 히틀러의 눈에 침을 뱉어준다!
브리타니아 만세! 영국은 결코, 결코, 결코 굴복하지 않는다!
당신은 B를 선택했습니다. 이걸로 좋습니까? (Y/N) Y
축하합니다! 당신의 승리입니다!


저런, 불만있으신가요? 아, ‘승리의 스릴이 없다’고요.
물론 이래서야 승리의 스릴이고 뭐고 없다. 너무나도 간단하기 때문이다.
아무런 노력이 필요하지 않으면 바로 이런 일이 생긴다.


2인 대전 게임에서 플레이어의 장애물은 바로 대전 상대이다. 플레이어는 상대방을 물리치기 위해 분투한다. 게임은 직접적인 경쟁관계로 구성되며, 이것이 게임에 장애물이라는 요소를 도입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식이다.
전력을 다해 싸우는 인간을 제압하는 것만큼 힘들고, 기량이 요구되는 일은 없다. 대전자야말로 가장 어려운 장애물인 것이다.
그러나 이외에도 게임에 있어서 장애물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소설을 생각해보자. 가장 기본적인 줄거리는 이런 것이다.
주인공 A에게 목표가 주어진다. 그는 장애물 B, C, D, E에 직면한다. A는 온갖 노력을 기울여 장애물 하나하나를 극복하며 성장한다. 드디어 그는 최후이자 최대의 장애물에 맞닥뜨리고 결국 그것을 뛰어넘는다. 해피엔드, 해피엔드.
그런데 이 장애물 B, C, D, E가 굳이 악당, 적, 원수와 같이 인간일 필요는 없다. 물론 잘 만들어진 적은 뛰어난 장애물이 되지만, 그 외에 대자연의 힘, 심술궂은 시어머니, 고장난 HDD, 나아가서는 주인공 자신의 무능함과 같은 것도 훌륭한 장애물이 될 수 있다.


게임도 마찬가지이다.
일반적인 RPG에서 ‘장애물’은 NPC이고, 플레이어들끼리는 서로 협력하게 되어 있다. 컴퓨터 게임에서 ‘장애물’은 꼭 풀어야만 하는 퍼즐의 형태를 갖는 경우가 많다. LARP에서 ‘장애물’은 필요한 단서, 아이템, 특수능력을 가지고 있는 다른 플레이어를 찾아내는 것의 어려움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혼자 하는 게임(solitaire)의 경우, 진행중 발생하는 불확정 요소, 또는 불확정 요소를 포함한 알고리즘이 실제적인 ‘장애물’로서 기능한다.


무엇을 게임의 목표로 설정하든지, 플레이어가 그 목표를 향해 도전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플레이어들을 서로 경쟁관계로 만드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만, 그 외에도 방법은 있다. 또 플레이어끼리 경쟁하고 있을 경우라도 다른 장애물을 등장시켜 게임을 더 재미있고 감동적인 것으로 만들 수도 있다.


‘협력적인 놀이’가 바람직하다는 것은, ‘투쟁이 없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만약 모든 싸움을 없애고 싶다면, 모든 생명을 말살하는 쪽이 빠를 것이다. 생명이란 생존과 성장을 위한 분투이기에, 이 세상에서 싸움이 사라질 날은 결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노력이 필요 없는 게임은, 죽어서 썩어버린 게임이다.


게임을 분석할 때에는 ‘이 게임의 장애물은 무엇인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도록 만드는 메커니즘은 무엇인가’라는 점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 자원관리
너무 쉬운 의사결정은 전혀 재미가 없다. ‘소영제국’을 생각해보자. 거기에는 진실한 의미에서 의사결정은 없었다.
혹은 해리스(Robert Harris)의 ‘부적(Talisman)’을 생각해보아도 좋다. 이 보드 게임에서는 보드의 주위를 따라 네모 칸이 늘어서 있고, 플레이어는 자기 순서에 주사위를 굴려서 나온 숫자만큼 말을 움직인다. 이때 말을 좌우 어느 쪽으로 움직여도 좋게 되어있다. 이동방향의 선택이 가능하므로 의사결정의 요소가 있고, 고전적인 것과 비교하면 약간 낫다. 그러나 100회중 99회는 어느 방향으로 움직여도 똑같거나 한 쪽으로 움직이는 것이 명백히 유리하기 때문에 의사결정의 의미가 사라진다.


의사결정이 의미를 갖게 하려면 플레이어에게 관리할 자원을 주어야만 한다.
‘자원’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많다. 기갑사단, 보급 점수, 카드, 경험치, 마법 지식, 영토 소유권, 미녀의 사랑, 상사의 신뢰, NPC의 호의, 돈, 식량, 섹스, 명성, 정보.


나아가서 게임에 여러 개의 ‘자원’이 있으면 의사결정은 더욱 복잡해진다.
이 짓을 하면 돈과 경험치를 얻을 수는 있지만 리사에게 미움을 사게 되지 않을까? 먹을 것을 훔치면 허기는 면하겠지, 하지만 잡히면 본보기로 손목을 잘리고 말 거야. 바로아 왕가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면, 에드워드 영국 왕은 내게 가스코뉴를 영지로 하사해 주시겠지만, 교황께선 나를 파문할지도 모른다. 그리되면 나의 영원한 혼도 풍전등화라…


이러한 의사결정은 그저 복잡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재미있는 갈등을 성립시킨다. 그리고 재미있는 갈등은, 게임을 재미있는 것으로 만들어준다.


그러므로 문제가 되는 자원은 게임규칙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만약 ‘나의 영원한 혼’이라는 것이 게임규칙에서 의미가 없다면, 파문을 당하건 어쨌건 대단한 문제가 아니다.
“아니지, 파문 당하면 농노의 충성심이 떨어지거나, 병사를 모으기가 어려워지는 단점이 있어”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농노나 병사가 게임규칙에서 의미를 갖고 있다는 의미다. 그렇지 않은가?
결국 ‘자원 관리’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게임 요소들을 관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게임상의 역할을 갖지 않는 ‘자원’은 성공과 실패에 기여하지 못하므로, 제 아무리 고려해 보아도 헛일일 뿐이다.


게임을 분석할 때에는 ‘이 게임에서 플레이어가 관리해야 할 자원은 무엇인가. 그러한 자원들은 의사결정에 있어 갈등을 일으킬 만큼 상이한가.
그것이 의사결정을 재미있게 만드는가’라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 게임 토큰
게임에서의 행동은 게임 토큰에 의해 실행된다. 게임 토큰이란 직접 플레이어가 조작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보드 게임에서의 말, 카드 게임에서의 카드, RPG에서의 인물(character), 스포츠에서는 플레이어 자신이 게임 토큰이다.


‘자원’과 ‘게임 토큰’은 다른 것이다. 자원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효율적으로 관리해야만 하는 것이고, 게임 토큰은 자원을 관리하기 위해 사용되는 수단이다.
예를 들어 시뮬레이션 워 게임에 있어서는 ‘전력(戰力)’이 자원에 해당하고, 부대를 나타내는 ‘말(counter)’이 게임 토큰이다. RPG에서 ‘돈’은 자원에 해당한다. 게임토큰인 ‘인물’을 통하여 자원을 모으거나, 낭비하는 것이다.


게임 토큰이 왜 중요한가. 그것은 만약 게임토큰이 없다면 플레이어는 손 쓸 도리도 없이 그저 게임 시스템이 멋대로 게임을 진행해 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라이트(Will Wright)와 하슬램(Fred Haslam)의 ‘심어스(Sim Earth)’가 그 좋은 예다. ‘심어스’에서 플레이어는 몇 가지 패러미터를 설정하고, 그 다음엔 게임이 자기 맘대로 진행하는 것을 앉아서 보고 있을 뿐이다. 게임 진행 중에 플레이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으며, 조작할 게임 토큰도 관리할 자원도 주어지지 않는다. 플레이어에게 주어지는 것은 조작할 수 있는 몇 개의 패러미터뿐이다. 덕택에 이 게임은 지루하지는 않아도, 그리 재미있지도 않다.


플레이어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한다고 느끼려면, 즉 게임을 플레이하고 있다고 실감하려면 게임 토큰이 꼭 필요하다.
그리고 게임 토큰의 수를 줄일 경우, 그 내용은 반드시 더 상세해야 한다.
RPG가 플레이어에게 단 한 개의 게임 토큰을 주는 반면, 토큰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예외적으로 자세한 규칙을 제공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게임을 분석할 때에는 ‘이 게임에 있어서 플레이어에게 주어지는 게임 토큰은 무엇인가. 그 토큰의 기능은 무엇인가. 토큰이 사용하는 자원은 무엇인가.
그것이 게임을 재미있게 만드는가’라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 정보
어떤 컴퓨터 게임 디자이너와 몇 번 이야기를 해본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이 디자인한 게임이 시뮬레이트하고 있는 매력적인 패러미터에 대해 가르쳐주었다. 나는 그저 “음, 그런가. 그건 미처 몰랐구먼”할 뿐이었다.


어떤 컴퓨터 시뮬레이션 게임에서 ‘날씨’라는 요소가 부대의 이동이나 방어력에 영향을 미친다고 하자. 그러나 만일 설명서에 그 사실을 적어놓지 않았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플레이어는 날씨가 의미를 갖는 것을 모르므로 날씨를 무시하고 행동할 것이다. 즉, 날씨는 플레이어의 의사결정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을 것이다.
혹은 설명서에 ‘날씨는 게임에 영향을 줍니다’라고 쓰여있다고 해도, 플레이어가 현재 날씨가 눈인지 비인지 알 방법이 없다고 하면, 역시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설명서에 설명이 있고, 현재의 날씨가 화면에 표시된다고 해도, 날씨가 게임에 주는 영향, 예를 들면 ‘이동력이 절반’, 혹은 ‘황무지를 통과할 때는 엉금엉금, 도로상에서는 영향 없음’라든지, 그러한 것을 알 수가 없다고 치자. 지금까지보다야 상당히 낫지만, 역시 불만이 남는다.


중요한 정보는 플레이어에게 제대로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리고 플레이어가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있어야만 비로소 현명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플레이어에게 모든 정보를 알려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정보를 숨기는 편이 더 좋은 경우도 있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는 자기 부대의 전투력을 알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이치에도 맞는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전투력이 어느 정도인가에 대해서, 대략적인 추측이 가능해야만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뗄 패에서 카드를 뽑을 때 실제로 어떤 카드가 올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만, 여기서 게임이 성립하는 것은 카드의 종류가 어떤 것이 있고, 바라는 카드를 뽑을 확률이 대강 어느 정도 된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뽑은 카드가 ‘하트의 퀸’, ‘사신(死神)’, ‘전함 포템킨’등등 아무거나 나온다고 하면 도대체 어떻게 의사결정을 할 수 있겠는가.


물론 플레이어에게 불필요하게 많은 정보를 알려주어서는 안된다. 특히 시간 제한이 있는 게임에서는 그렇다.
날씨, 보급상황, 지휘관의 정신상태, 병사의 피로도, 어젯밤 라디오에서 Tokyo Rose가 떠들어댄 내용, 이런 것 모두가 게임에 영향을 준다고 치고, 5초 이내에 행동을 결정해야만 한다고 하자. 만약 화면에 메뉴를 불러내어 관련 정보를 모두 조사하려고 든다면 5분은 넘게 걸릴 것이 틀림없다.
이럴 경우, 대량의 정보를 제공해도 그다지 의미는 없다. 설령 플레이어가 제한시간 내에 이 정보를 모두 읽어본다 하더라도, 그것을 유효하게 활용하는 것은 무리이기 때문이다.


(역주) Tokyo Rose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NHK의 대미선전방송을 담당한 일본계 2세 여성에게 미국 병사들이 붙여준 닉네임.


혹은 컴퓨터 어드벤처 게임을 생각해보자. 화면에 정보를 적절히 표시하지 않는 경우는 많다.
“저런, 타나토스의 문을 통과하려면, 자물쇠를 따기 위한 모자 핀이 필요하잖아요. 핀은 도서실 바닥에 떨어져 있었죠. 대강 3 x 2 도트의 크기였고, 시력이 좋았으면 보였을 걸요. 장소는 12번째와 13번째 마루바닥 틈 사이였고, 화면 위에서 3인치 정도 밑에 표시되어 있었죠. 정보는 보여드렸어요. 예? 못 봤다고요? 그러면 유감이지만 게임 오버네요. 처음부터 다시 한번 하실래요?”


확실히 못보고 넘어간 건 내 잘못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필요한 아이템을 찾아내는 것이 터무니없이 어렵다든지, 3시간 38분전의 실수가 원인이 되어서 오도가도 못하게 된다든지, 퍼즐의 답이 너무나도 독단적이거나 억지스럽다면 그런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특별히 어떤 게임이라고는 말하지 않겠지만.


자유진행형(free form) 게임을 보자. 이 경우에는 보통 플레이어에게 목표가 주어진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A, B, C라고 부르기로 하자)를 찾아내야 한다.
이때 디자이너는 A, B, C를 찾으면 찾아낼 수 있도록 해두는 편이 좋다. 다른 캐릭터가 알고 있다든지, 게임에서 쓰는 카드에 쓰여있다든지, 방법이야 어쨌거나 발견할 방법이 무언가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플레이어는 절대로 목표를 달성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절대로 이길 수 없는 게임은 실로 재미없는 것이다.


게임을 분석할 때는 ‘주어진 상황에서 플레이어가 의사결정을 내리려면 어떠한 정보가 필요한가. 적절한 때, 적절한 정보가 플레이어에게 주어지는가. 플레이어가 어느 정도 생각해보면 필요한 정보가 무엇이고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를 추측할 수 있는가’라는 점을 살펴보아야 한다.


* ‘게임’을 매력적인 것으로 만드는 다른 요소


– 교섭과 상호 지원
만약 노력하여 극복할 장애물이 아무것도 없다면, 목표를 달성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그러나 플레이어가 서로간의 장애물이 되는 게임일 경우에도 반드시 그 게임이 ‘제로 섬형’인 것은 아니다.


(역주) ‘제로 섬형’게임이란, 본래 ‘누군가가 득을 보면, 그만큼 다른 사람이 손해를 보는’ 타입의 게임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어떤 의사결정에 대해서도, 득을 보는 것은 한 명뿐이며, 상호 이익이라고 하는 요소가 없는’ 게임을 말한다.


멀티 플레이어 게임에서 플레이어간의 교섭을 허용하고 나아가 그것을 장려하게 되면, 그 게임은 보다 매력적인 것이 된다. 플레이어간에 서로 직접 원조하거나, 또는 공동의 적을 앞에 두고 연합하여 상호 지원이 가능하다면, 이 게임에서는 교섭이 허용된다고 말할 수 있다.


모든 멀티 플레이어 게임이 플레이어간의 원조나 상호 지원이라는 요소를 도입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대로우(Charles B. Darrow)의 ‘모노폴리(monopoly)’에서는 다른 플레이어를 돕거나, 방해할수 있는 좋은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둘이서 동맹을 맺고 독점하겠다’라든가 ‘너는 초심자니까 도와주지. 대신 내게 협력해라’라고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또한 상호지원이라는 요소를 어느 정도만 도입하고 있는 게임도 있다.
해리스(Lawrence Harris)의 ‘주축국과 연합국(Axis & Allies)’에서 플레이어는 어느 정도까지 서로간에 협력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플레이어는 최후까지 주축국측 또는 연합국측 중 하나이며 배신할 수 없기 때문에, 이 게임에서 상호지원은 보조적인 역할만을 수행한다.


게임에서 상호지원을 장려하는 하나의 방법은 복수 플레이어의 동시 승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약속의 궤’를 찾는 고고학자이고, 내가 나치스와 싸우는 군인이며 지금 나치스가 약속의 궤를 손에 넣었다고 하면, 우리는 손을 잡을 수 있다. 그러나 프랑스 레지스탕스가 나치스에게서 약속의 궤를 탈취하면, 이 동맹은 해소되고 우리들은 적으로 돌아서게 될 것이다. 이러한 반전이 거듭되는 전개는 게임을 재미있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플레이어끼리 적대하는 게임에서도 교섭을 장려할 수 있다.
외교 게임의 명작이라면 맨 먼저 칼해머(Allen B. Calhammer)의 ‘디플로머시(diplomacy)’를 꼽을 수 있다. 이 게임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전략보다도 외교가 더 중요하다. 열쇠가 되는 것은 ‘지원’ 행동이며, 이로 인해서 한 나라가 다른 나라의 공격을 도울 수 있다. 이 때문에 동맹을 맺는 것이 대단히 중요해진다.
‘디플로머시’에서 동맹은 결코 오래가지 않는다.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는 터키와 싸우기 위해 동맹을 맺을지도 모르지만, 최종적인승리자는 한 명뿐이기 때문에 머지 않아 한 쪽이 먼저 배신하게 될 것이다.


멋진 일이다. 배신이 가능하기 때문에 비로소 동맹을 맺고, 그것을 유지할 필요가 생기는 것이다. 다른 플레이어를 설득해서 동맹에 끌어들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외교의 기회조차 잃는다.
만일 배신할 수가 없다고 하면 외교를 할 필요도 사라져버릴 것이다.


컴퓨터 게임은 본질적으로 거의 완전히 1인용 게임(solitaire)이기 때문에, 컴퓨터 측의 NPC와 교섭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일반적으로 그러한 교섭은 별로 재미가 없다.
이것에 비해서 네트워크 게임은 본질적으로 교섭 게임이다. 혹은 그래야 한다.
그러나 네트워크 게임이 보급됨에 따라, 컴퓨터 게임 속에서 자라난 디자이너가 네트워크 게임 디자인에 손을 대게 되면서 교섭이라는 포인트를 아예 지나쳐버리고 있는 것인 아닐까. 그 증거로서, 인터랙티브 TV 네트워크의 입안자들이 게임에 대해 말할 때면, 언제나(닌텐도나 세가의) 가정용 게임기의 소프트웨어를 케이블 TV로 다운로드 받는다는 이야기밖에 나오지 않는다.


(역주) ‘인터랙티브 TV’란 케이블 TV에 양방향성을 갖게 하여, 시청자가 프로그램 내용이나 화면 구성을 조작할 수 있게 만들거나, 쇼핑이나 소프트웨어 판매 등의 새로운 서비스를 가능케 하는 계획을 말한다.


이것은 사업상의 이유에 의한 것이다. 가정용 게임기 시장은 연간 몇 십억 달러나 되는 매상을 올리고 있으며, 그들은 그 떡고물이나마 맛보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네트워크가 전혀 다른 게임을 제공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이 틀림없다. 그것만으로도 몇십억달러의 시장을 기대할 수 있는 진짜 사업의 기회일텐데.


게임을 분석할 때는 ‘플레이어는 어떻게 서로간에 돕거나, 훼방놓을 수 있는가. 그렇게 하도록 만드는 동기는 무엇인가. 교섭의 소재가 되는 자원은 무엇인가’라는 것을 생각해야만 한다.


– 분위기
‘모노폴리’는 부동산업을 사실적으로 다룬 게임이다. 그렇지 않은가?
아니, 그렇지 않다. 물론 그렇지 않고 말고. 그런 소릴 했다간 부동산 업자가 비웃는다. 은행 대출, 주택 조합과 그 활동, 당국의 감사원에 대한 뇌물, 그러한 것을 게임 규칙으로 만들지 않으면 부동산업을 사실적으로 다룬 게임이라고는 부를 수 없다.
‘모노폴리’는 실제의 부동산업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바란다면 이 게임의 규칙을 그대로 두고, 보드와 말, 카드의 서술 내용을 바꾸기만 하여 우주탐사게임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우주탐사게임이 실제 우주탐사를 사실적으로 다루고 있는 정도라고 하는 것은, 조금 전의 ‘모노폴리’가 실제의 부동산업을 사실적으로 나타내는 정도에 비해 나으면 나았지 못할 것이 없다.


실제로 ‘모노폴리’는 추상적인 게임이며, 어떤 구체적인 것을 시뮬레이트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게임은 일부러 부동산업의 분위기를 내기 위해서 지역의 이름, 집이나 호텔 모양을 한 플라스틱 말, 장난감 지폐 등을 소도구로서 쓰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모노폴리’를 매력적으로 만드는 커다란 요소인 것이다.


게임에 있어서 분위기는 대단히 중요하다.
해리스(Lawrence Harris)의 ‘주축국과 연합국’은 제 2차 세계대전을 정확하게 시뮬레이트하고 있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분위기는 어떤가.
바닥에 가득 늘어놓을 수 있을 만큼의 플라스틱 전투기, 전함, 탱크. 달아오르는 주사위 굴림. 눈앞에 펼쳐지는 전장. 이 게임의 매력은 거의 대부분 분위기에서 유래한다.


아니면 채드윅(Chadwick)의 ‘스페이스 1899(space 1899)’를 살펴보자.
이것은 버로우즈의 모험활극, 펄프 픽션의 흥분, 키플링의 빅토리아 시대를 섞어서 맛보이고자 하는 RPG이지만, 게임 규칙을 읽어보는 한 도저히 그러한 느낌은 나지 않는다. 시스템은 잘 만들어져있고, 배경세계 설정도 자세한데, 어찌된 노릇인지 분위기가 나질 않는 것이다. 그 때문에 이 RPG는 실패작으로 끝났다.


이처럼 게임에 마음이 끌리게 만드는 매력을 부여하는데 있어서, 볼거리, 분위기 조성, 상세한 설정, 좋은 센스 등의 요소는 우습게 볼 것이 아니다.
이러한 것이 게임의 본질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해도 말이다.


‘주축국과 연합국’이 처음에 노바(Nova)에서 판매되던 당시, 게임으로서는 나중에 밀튼 브래들리(Milton Bradley)에서 재판(再版)된 것과 실질적으로 아무런 차이도 없었다.
그러나 이 오리지널 버전은, 신조차도 용서치 않을 만큼 천박한 지도와 지금까지 내가 본 중에서도 최악의 말(counter)을, 도저히 구제불능인 촌스러운 상자에 담아 팔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것을 한번보고는 바로 옆으로 치워 버렸다. 이후 이 버전을 본 적은 한번도 없다.
그런데 밀튼 브래들리판은, 그 자그마한 플라스틱 말을 가지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즐겼었다. 같은 게임인데 이런 차이가 생기는 이유는 단 하나, 즉 분위기인 것이다.


게임을 분석할 때는 ‘이 게임은 감정과 분위기를 북돋우고,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어떤 수법을 사용하는가. 분위기를 한층 더 살리기 위해서는 어디를 어떻게 개선하면 될 것인가’하는 것을 생각해야만 한다.


– 시뮬레이션
모든 게임이 무언가를 시뮬레이트하는 것은 아니다. 동양의 전통적인 게임인 ‘바둑’을 생각해보자. 바둑판 위에 돌을 놓아 가는 이 게임은 완벽하리만큼 추상화된 게임이다.
혹은 콘웨이(John Horton Conway)의 ‘라이프(Life)’도 좋다. 마치 생명활동을 시뮬레이트하는듯한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 이것은 수학적인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나, 앞서 말한바와 같이 분위기는 게임을 대단히 매력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리고 현실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시뮬레이트한다는 것은 이 분위기 조성을 위한 좋은 방법이다.


그런데 내가 아는 한, 왠지는 몰라도 워털루 전투를 다룬 게임은 히트하는 예가 많은 것 같다. 그 점에 착안해서 어디서 ‘모노폴리’를 하나 사다가, 이를테면 ‘파크 플레이스(Park Place)’를 ‘카틀 브라(Quatre Bras)’로 바꾸고, 호텔의 말을 플라스틱 병사로 대체하고 게임의 이름을 ‘워털루’라고 짓는다면, 틀림없이 히트할 게임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역주) ‘카틀 브라’는 워털루 전투의 전초전이 치러졌던 장소


그러나 전투를, 전장을 이동하는 부대를, 포격의 굉음을 시뮬레이트하고 싶다면 이런 식으로 그저 다른 게임을 가져다 이름만 바꿔쓰는 것 보다 좀더 나은 방법이 있지 않을까?


내가 디자인한 ‘스타워즈 RPG’를 갖고 이야기를 해보자.
그저 스타워즈같은 분위기를 내기 위해서라면 가이각스(Gygax)와 아르네슨(Arneson)의 ‘던젼즈 & 드래곤즈(Dungeons & Dragons)’를 가져다 ‘검’을 ‘블러스터’로 바꾼다든지, 그런 식으로 이름만 바꿔서 만들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 목표는 영화를 시뮬레이트하는 것이었다. 플레이어들이 근사한 영화적 액션에 도전하도록 장려하고, 영화가 지닌 분위기나 정신을 시스템 그 자체에 반영하고자 했던 것이다.


시뮬레이션에는 그 외에도 유익한 점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시뮬레이트되는 인물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깊게 해 준다는 점이다.
아까 예로 들었던 ‘모노폴리’의 도작판 ‘워털루’를 제 아무리 플레이해봐야 아무도 웰링턴이나 나폴레옹의 입장이 되어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주커(Kevin Zucker)의 ‘나폴레옹의 마지막 전투(Napoleon’s Last Battles)’를 플레이하면 그들이 직면했던 전략적인 문제에 대해 고찰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훨씬 더 그들의 생각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시뮬레이션이라는 수법에 의해, 당시의 상황에 대해 그저 역사책을 읽는 것으로는 얻을 수 없는 보다 깊은 통찰을 얻을 수 있다. 또 결과가 역사적 사실과 달라지는 경우에 대해서도 연구할 수 있다. 마치 ‘심시티’에서 갖가지 도시를 만드는 것과 같이.
실제로 워털루 전투를 다룬 시뮬레이션 게임을 적어도 한 타스는 플레이해 본 덕택에 나는 이 전투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왜 그 상황에서 나폴레옹과 웰링턴이 그와 같은 선택을 했는지, 나폴레옹 전쟁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워털루 전투를 다룬 책을 한 타스 읽어도 여기까지 이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분위기 조성을 위해 그저 이름만 빌려오는 것에 비해, 무언가를 제대로 시뮬레이트하고자 하면 확실하게 게임이 복잡해져버린다. 그러므로 모든 게임이 시뮬레이션이라는 수법을 도입해야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시뮬레이트라는 수법이 정말로 놀랄만한 힘을 발휘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도 또한 사실인 것이다.


게임을 분석할 때에는 ‘시뮬레이션이라는 요소가 이 게임을 어떻게 매력적으로 만들고 있는가’하는 점을 살펴보아야 한다.


– 다채로운 전개
‘너, 운이 좋아서 이겼어’
있을법한 패자의 대사이다. 자신은 실력으로 패한 것이 아니고, 그저 운이 안 따라주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말이 모욕이 된다는 것은, 경험과 두뇌와 실력으로 우수한 편이 반드시 승리할 수 있는 게임이야말로 좋은 게임이며, 운의 영향을 받는 게임은 명백히 열등한 것이라는 의미가 아닌가?


아니, 그렇게는 말할 수 없다.
흔히 말하는 게임의 ‘불확정 요소’라는 것은, 결코 완전히 불확실한 것이 아니다. 어떤 가능성의 범위 내에서 불확정한 결과가 나올 뿐이다.
시뮬레이션 게임을 플레이할 때, 나는 공격할 때마다 전투 결과표를 본다.
이때 나는 어떤 결과가 나올 수 있는가, 바라는 전과를 올릴 확률이 어느 정도인가를 인식한다. 물론 공격에 따르는 위험부담도 계산한다.
개개의 판정에 대해서는 불확정요소가 크다고 해도 게임을 마지막까지 플레이하는 동안 몇십, 몇백 번이나 주사위를 굴리게 되므로, 확률의 법칙이 작용하여 전체적인 불확정성은 어느 정도까지 떨어지게 된다. 극히 드문 경우를 제외하면, 보다 뛰어난 전략을 취한 쪽이 승리를 손에 쥐게 된다.
주사위 운만으로 전략적인 실수를 만회하는 것은 무리한 이야기다.


그러면, 게임에 있어서 불확정 요소는 중요한 의미가 없는 것인가.
아니, 불확정 요소에는 큰 역할이 있다. 그것은 게임에 다채로운 전개를 유발하는 수법의 하나인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설명해보자.


몇 번 플레이해도 매번 같은 전개가 나오는 게임은 한심하게 지루하다.
플레이어는 지금까지 경험한 적이 없는 게임 전개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러려면 그 게임에서 일어날 수 있는 국면의 수가 충분히 많아야만 한다. 그렇게 되면 플레이 할 때마다 언제나 무언가 새로운 전개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체스’같은 게임에서는 ‘무언가 새로운 전개’라는 것은 말의 배치에 의해 생기는 국면의 변화이다.
가필드(Richard Garfield)의 ‘매직 더 개더링(Magic: the Gathering)’의 경우 카드의 종류, 그것이 뗄 패에서 나오는 순서, 카드의 조합에 의해 발생하는 효과 등이 다채로운 전개를 낳는다.
아르네슨과 가이각스의 ‘던젼즈 & 드래곤즈’에서 다채로운 전개를 만드는 것은 아찔해질 정도로 많은 몬스터, 주문 등과 그것을 이용해 계속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내는 게임 마스터의 역량이다.


다채로운 전개를 만들지 못하는 게임은 금새 질려버린다. 이것이 컴퓨터 어드벤처 게임을 여러 번 플레이 할 수 없는 이유이다. 처음에 플레이 할 때는 충분히 다채로운 전개가 준비되어 있는 것 같지만, 몇 번 해보면 비슷한 전개에 지나지 않는 것이 들통난다.
트럼프를 혼자서 즐기게 만든 게임인 ‘페이션스(Patience)’가 금새 질리는 이유도 똑같다. 몇 번 해봐야 비슷한 전개일 뿐이고, 카드를 잘 섞어봐야 새로운 흥분이 생기는 것도 아닌 것이다.


게임을 분석할 때는 ‘이 게임에서는 어떠한 전개가 생기는가. 그것은 플레이어가 몇 번이고 시도해보고 싶어질 만큼 다채로운가. 그 다채로움을 만드는 장치는 무엇인가. 보다 다채로운 전개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 감정이입
‘인물에의 일체화’는 모든 이야기 창작활동에 공통되는 주제이다. 독자가 작중 등장인물을 좋아하고, 자신과 동일시하고, 그 운명을 걱정하게 된다면 작가로서는 더 바랄게 없다. 감정이입은 스토리에 감동의 힘을 부여한다.


게임도 마찬가지다. 플레이어가 ‘우리편’에 감정이입하고, 게임 안에서 생기는 일을 자기 자신의 문제로서 느끼게 되면 게임은 감동적인 체험이 될 수 있다.


그 극단적인 예로 스포츠를 들 수 있다. 스포츠에서 감정이입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나 자신이 야구장의 마운드에 서있고, 승패는 내 어깨에 달렸다. 삼진시키거나, 홈런을 맞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인 것이다. 그렇기에 게임의 진행은 중요한 문제로 느껴진다.


이처럼 스포츠는 게임에 대한 감정이입이 너무나도 강하기 때문에, 플레이어가 욕지거리를 내뱉거나 난동을 부리는 사태로 치닫는 것조차 드문 일이 아니다. 이러한 불쾌한 행동을 억제하기 위해, 일부러 ‘스포츠맨 십’이라는 문화적 행동규범을 만들어내야만 할 정도이다.


스포츠와 비교하면 RPG에서의 감정이입은 조금 간접적이다. 감정이입의 대상은 플레이어 자신이 아니고 PC이다. 그러나 플레이어는 자신의 PC를 만들고 성장시키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고 있다. 게다가 PC는 플레이어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게임 토큰으로, 그 외에는 감정이입 대상이 없다. 그러므로 PC에 대한 감정이입은 자연히 강해진다.
그렇기에 스포츠만큼 빈번하지는 않아도, RPG 플레이어가 게임 마스터를 욕하거나, 한 걸음 더 나아가 두들겨 패는 경우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이처럼 플레이어가 게임 토큰을 하나밖에 갖고 있지 않을 경우, 그토큰에 대해 극히 자연스럽게 감정이입하는 법이다. 반대로 많은 토큰을 조작할 수 있을 경우, 개개의 토큰에 대한 감정이입은 어려워진다. ‘체스’에서 자신의 나이트를 잃었을 때 비탄에 잠기는 사람은 별로 없고, 시뮬레이션 게임에서 보병사단이 하나 전멸했다고 해서 목을 매는 사람도 없다.
다만 이러한 경우에도 플레이어가 여러 토큰을 뭉뚱그려 ‘국가’나 ‘군대’, ‘우리편’과 같은 하나한 대상으로 생각하고, 이에 대해 감정이입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면 게임을 보다 감동적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감정이입을 촉진하는 한가지 수법은 플레이어의 시점을 어디에 둘 것인가
명확히 정해주는 것이다.
보드 게임의 디자인에서 시점의 혼란은 매우 흔한 실수이다. 버크(Richard Berg)의 ‘북 아프리카 전선(Campaigns for North Africa)’을 예로 들어보자. 이 게임은 추축국의 북아프리카 전선에 대한 대단히 현실적인 시뮬레이션을 시도하고 있다. 플레이어는 파일럿 한명한명을 어디에 배치할 것인가 하는 문제부터 개개의 대대에 대한 음료수 보급상황에 이르기까지 장시간에 걸쳐 모든 것을 관리해야 한다.
그런데 사실 롬멜의 부하는 이러한 것을 관리했겠지만, 롬멜 자신이 이런 시시콜콜한 일까지 도맡아 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전체적인 전략을 생각하고 또한 세부적인 관리도 해야만 하는 플레이어는, 대체 어느 쪽의 입장이 되어 있는 것일까. 어느 쪽에 감정이입해야 되는 것일까.
이것이 시점의 혼란이다. 이 게임에서는 개개의 항목을 상세하게 시뮬레이트하고자 한 나머지, 어떤 의미에서는 도리어 시뮬레이션의 정확함을 망쳐놓고 있는 것이다.


게임을 분석할 때, ‘플레이어를 감정이입케 만드는 요소는 무엇인가.
플레이어에게 있어서 중요한 게임 토큰이 하나로 압축되어 있는가. 그렇다면 그 토큰에 대한 감정이입을 보다 강화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반면 게임 토큰을 하나 이상 두겠다면 무엇에 대해 감정이입하게 하는가. 그것을 강화하는 수단은 무엇인가. 이 게임에 있어 플레이어는 누구의 입장이 되는가. 플레이어의 시점을 어디에 둘 것인가’등을 생각해야 한다.


– 롤플레이
‘히어로퀘스트(HeroQuest)’는 ‘롤플레잉 보드 게임’이라는 선전문구와 함께 판매되고 있다. 이 게임에서는 RPG처럼 각 플레이어에게 한 명씩 PC가 주어지고, PC는 보드 위에 놓여진 플라스틱 말로 표현된다.
플레이어가 한 명의 인물을 맡는다는 것은 ‘배역(role)을 연기(play)’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되고, 그렇다면 이 게임의 ‘롤플레잉’이라는 선전은 옳은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아니, 그렇지 않다. 이 게임에서는 아무도 ‘롤플레이’같은 것을 하지 않는다.
문제는 ‘감정이입’과 ‘롤플레이’의 혼동에 있다. 이 두 가지는 다른 것이다. 전혀 롤플레이 하지 않고서도 하나의 게임 토큰에 강하게 감정이입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감정이입은 플레이어에게서 캐릭터로 향한 움직임이고, 롤플레이는 캐릭터에서 플레이어로 향한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다. 양자는 방향이 반대인 것이다.
롤플레이의 방법은 사람에 따라, 또한 게임에 따라 다양하다.
캐릭터의 모국어나 말투를 흉내내어 말할 수도 있고, 대사에 감정을 담기도 있다. 보통과 다를 바 없이 말하지만 ‘다음에 어떤 수를 쓸까’가 아니고 ‘이 PC는 이럴 때 어떻게 할까’라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면 그것도 롤플레이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롤플레이를 가장 잘 활용하고 있는 것은 RPG이다. 그러나 다른 게임에서도 롤플레이가 적용된다.
예를 들어 나는 자오(Vincent Tsao)의 ‘훈터(Junta)’를 플레이할 때, 자꾸 잘 알지도 못하는 스페인 풍의 악센트를 섞어서 지껄인다. 어쨌거나 이 게임을 하고 있으면 머릿속부터 부패한 바나나 공화국의 거물로 바뀌어버려서, 싫어도 롤플레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롤플레이가 게임 디자인에 있어 대단히 유효한 테크닉인 이유는 여러 가지 있다.
우선 감정이입을 강화하는 효과가 있다. PC처럼 생각하고자 하면, 자연히 PC에 강한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
또한 게임의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효과가 있다. 게임은 PC의 존립 근거이기 때문에 PC를 롤플레이하다보면 플레이어는 게임 내용을 의심하지 않으려 하게 되며, 게임 세계가 생생하고, 분위기가 근사하며, 모순이 없도록 관리하는 역할도 나누어 맡게 된다.


마지막으로 롤플레이에는 플레이어 사이의 교류를 깊게 해 주는 효과가 있다.
사실 이 점이 가장 중요하다 할 수 있다. 롤플레이는 일종의 연기이며, RPG에서 플레이어는 주위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려고 연기를 한다. 뒤집어 말하면 보아줄 사람 없이는 연기를 할 이유가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이것이 이른바 ‘컴퓨터 RPG’가 실제로는 RPG가 아닌 이유이다.
롤플레잉과 관련이 없다는 점에서 보면, 컴퓨터 RPG는 ‘히어로퀘스트’와 비슷하다.
사실 등장하는 함정, 인물, 물품, 줄거리는 RPG에 나오는 것과 동일하다. 그러나
컴퓨터 RPG에는 플레이어가 연기를 하도록 만드는 장치가 없다. 플레이어는 어떠한 의미에서도 롤플레이를 하지 않는다.


본질적으로 컴퓨터 게임은 혼자서 즐기기 위한 것이다. 혼자서 즐긴다는 것은 결국 관객이 없다는 뜻이고, 관객이 없으면 연기를 할 필요도 없다. 따라서 플레이어에게 롤플레이를 하게 만들 수 없다.
그러나 네트워크를 이용하면 같은 컴퓨터로도 RPG를 할 수 있게 된다. 그 때문에 MUD가 그리도 인기가 있는 것이다.


(역주) MUD (Multi-User Dungeon)
인터넷상의 서버에서 실행되는 다수참가형 게임 프로그램. 무대는 ‘로그’처럼 텍스트 그래픽으로 표시되며, 상황은 ‘조크’처럼 텍스트로 표시된다. 여기서 복수의 플레이어가 상호간에 채팅(온라인 대화)하면서 전투를 벌인다.


게임을 분석할 때는 ‘어떻게 플레이어로 하여금 롤플레이를 하도록 만드는가. 이 시스템에선 어떠한 연기가 가능하며, 어떠한 연기를 목표하는가’는 점을 검토해야 한다.


– 플레이어간의 교류
역사적으로 게임은 주로 사교 수단으로 사용되어 왔다.
‘브리지(Bridge)’, ‘포커(Poker)’, ‘제스처 게임(Charades)’ 등을 하는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은 함께 플레이하는 사람들간의 교류이며, 승패는 둘째라고 해도 좋다.
그러므로 오늘날에 상업적으로 히트한 게임의 태반이 게임기나 컴퓨터 게임처럼 본질적으로 1인용이란 점은 상당히 기묘한 일이다.
예전에는 게이머라고 하면 테이블에 둘러앉아 트럼프를 즐기는 사람들이라는 이미지였다. 그러나 요즘에 게이머라고 하면, 번쩍번쩍 빛나는 모니터를 보면서 조이스틱을 움켜쥔 고독한 청소년이 먼저 떠오른다.
그러나 1인용 놀이 이외의 게임이 전멸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예를 들어 RPG나 LARP처럼 롤플레이에 기반한 게임은 순조롭게 발전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RPG나 LARP처럼 롤플레이에 기반한 게임은 순조롭게 발전하고 있는데, 롤플레이는 전적으로 사람간의 교류에 의존한다.
게다가 ‘트리비아(Trivial Pursuit)’나 ‘픽셔너리(Pictionary)’처럼 정말로 널리 보급된 보드 게임은, 대개의 경우 아주 사교적인 장소에서 플레이되지 않는가.
그렇기에 나는 현재 컴퓨터 게임의 태반이 1인용인 것이 기술적 제약에 따른 일시적인 문제이며, 네트워크가 보급되고 속도가 향상되면 다시 게임과 ‘플레이어간의 교류’는 끊을 수 없는 관계로 돌아갈 것이라고 믿고 있다.


게임을 디자인 할 경우, 그 게임이 플레이어간의 교류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게임 시스템이 교류를 촉진하는가 아니면 저해하는가 잘 생각해보는 편이 좋다.
대부분의 PC통신 서비스에는 ‘포커’나 ‘브리지’같은 전통적인 게임을 온라인으로 플레이할 수 있는 소프트가 준비되어 있지만, 거의 아무도 이용하지 않는다.
‘아메리카 온라인(AOL)’의 경우는 예외인데, 다른 PC통신과 달리 아메리카 온라인에서는 복수의 플레이어가 리얼타임으로 채팅을 이용한 대화를 즐기며 ‘브리지’를 플레이할 수 있다. 왜 이 서비스에만 사람들이 몰리는지 한번 생각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른 예로서 많은 RPG의 디자이너가 범하고 있는 오류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 오류란 ‘리얼리티’에 너무 집착하다가 플레이어가 게임을 하는 이유를 잊어버린다는 점이다.
극히 리얼리티를 중시한 전투 시스템을 만들었다고 하자. 한 라운드를 처리하는데 15분, 한 전투가 끝나는데 4시간쯤 걸린다고 하면 그게 무슨 가치가 있을까. 그 동안 교류도 없고, 대화도 나누지 않고, 롤플레이마저 하지 않으며, 단지 묵묵히 주사위를 굴리고는 전투결과표를 볼뿐이라면, 누가 그런 걸 플레이한다는 말인가.


게임을 분석할 때에는 ‘게임에서 플레이어간의 교류를 보다 촉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점을 생각해야만 한다.


– 극적인 클라이맥스
네뷸러 상을 수상한 작가 머피(Pat Murphy)에 따르면, 소설의 플롯을 만드는 비결은 ‘긴박감을 높여 가는 것’에 있다고 한다. 즉, 스토리가 진행됨에 따라 이야기를 점점 흥미진진하게 만들어 최종적으로 클라이맥스가 해결될 때까지 독자의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는 이야기다.


당신이 양키즈의 팬이라고 치자. 물론 당신은 양키즈의 승리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야구장에 달려간 당신은 양키즈가 제 1회초부터 7점차로 리드하고, 그대로 21대 2정도의 엄청난 점수 차로 이기는, 그런 시합을 보고 싶은가? 그야 양키즈가 지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그런 시합은 재미없다고 생각할 것이 틀림없다.
그에 비해서 9회말 종료직전 이제 이걸로 끝이다 싶을 때, 양키즈가 역전 굿바이 만루홈런을 날려준다면 아마 당신은 흥분과 환희에 못 이겨 자리에서 뛰어오르며 환성을 올릴 것이다.
이처럼 긴박감은 게임을 재미있게 만들어준다.


플레이 중 계속 긴박감이 이어지는 게임이 이상적이지만, 그것은 무리더라도 최소한 끝부분에서는 긴박감 넘치는 게임 전개가 바람직하다. 끝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 최대의 난관을 돌파했을 때 비로소 게임은 고조되는 법이다. 물론, 매번 이런 식으로 게임을 극적인 전개로 끌고 가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 플레이어간에 직접적으로 대결하게 되어 있는 게임에서는 그렇다.
‘체스’의 그랜드 마스터와 초보자가 대전해봤자, 긴박감도 분위기 고조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1인용놀이인 컴퓨터 게임에서는 각 장면마다 장애물을 배치하더라도, 진짜 난관은 끝에다 둘 수가 있다. 실제로 안티 클라이맥스라는 실패를 범하고 있는 게임은 대단히 많다.
끝부분이 아니라 중반에 긴박감이 최고로 끓어올라버려서 거기서 중요한 적이 도망쳐버린다든지, 캠페인 도중에 인물이 너무 강해져서 무적이 되어버린다든지, 그 결과 시큰둥한 기분으로 결말을 맞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되는 원인은 대개 디자이너가 극적인 고조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탓이다.


게임을 분석할 때는 ‘이 게임을 고조시키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라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 모든 게임은 주사위 아래 형제이다.



…… 혹은 새벽의 샛별 아래, 또는 하여간 무언가의 아래에서


이제야 겨우 처음에 제기했던 질문에 답할 준비가 되었다.


질문 : 무수한 종류가 있는 게임에서 공통되는 요소가 있을까?
답변 : 확실히 있다. 모든 게임은 ‘의사결정’, ‘자원관리’, ‘목표’를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체스’, ‘세븐스 게스트(Seventh Guest)’, ‘슈퍼 마리오(Mario Brothers)’, ‘뱀파이어(Vampire)’, ‘룰렛(Roulette)’, ‘매직 더 개더링’ 모두에 공통된다.
이것이야말로 ‘게임’의 정의인 것이다.


질문 : ‘좋은 게임’과 ‘나쁜 게임’을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가?
답변 : 유감스럽게도 아직 최종적인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게임의 매력을 분석할 때 유용한 기본개념은 몇 가지 발견할 수 있다.
‘체스’의 매력은 복잡하고 까다로운 ‘의사결정’에 있다. ‘매직 더 개더링’의 매력은 한없이 다채로운 전개에서 찾을 수 있다. ‘룰렛’은 강렬한 ‘목표’ -진짜 돈- 를 갖는다.
보다 상세한 분석이 가능하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것은 독자를 위해 남겨두도록 하자.


지금까지 제시한 게임분석이론이 최종적인 완성판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는 것은 확실하다. 세상에는 앞에서 설명했던 나의 이론의 일부 -전부라고는 할 수 없어도- 를 부정할 수 있는 게임이 존재한다. (예를 들면 ‘캔디랜드(candyland)’에는 의사 결정의 요소가 전혀 없다) 그러므로 이 게임론은 중간보고라고 생각하기 바란다. 언젠가 ‘게임 디자인 기법의 분석’이라는 표제로 집대성될 개괄적 체계를 구축하기 위한 최초의 시도라고.
이 글을 읽은 분들이 내가 여기서 제시한 분석 기법을 기반으로 이론을 전개해 주면 감사하겠다. 또한 나의 이론에 찬성할 수 없는 사람은 다른 이론을 제안하여 반론해주길 기대한다.


만약 게임 디자이너가 ‘예술’이라고 불릴 가치가 있는 일을 하고 싶다면, 그렇진 않더라도 어쨌거나 상업적인 성공 이상의 목표를 추구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생각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게임 디자이너라는 직업은, ‘관객이 참가하는 민주적 예술’의 창조를 지향하는 혁명적 대열의 선두에 서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 운동이 성공한다면 게임 디자이너는 인류의 문명을 더욱 높일 수 있으리라. 실패한다면 이 TV시대에 지성이 결여된 그저 그런 오락이 또 하나 생겨났다는 것으로 결말지어질 것이 틀림없다.


저자는 다음 분들의 아이디어를 자유로이 빌릴 수 있었던 것에 대해 깊은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Chris Crawford, Will Wright, Eric Goldberg, Ken Rolston, Doug Kaufman, Jim Dunnigan, Tappan King, Sandy Peterson, and Waltfreitag


표기법에 대해서
통상 ‘체스’, ‘바둑’, ‘포커’등의 전통적 게임의 명칭은 보통명사로 다루어지므로 영어에서는 첫글자를 소문자로 표기한다. 반면 새로이 디자인된 게임의 명칭은 고유명사이므로 영어에서는 첫글자를 대문자로 표기하게 된다.
게임의 예술의 일종이며 모든 게임은 그 기원에 관계없이 작품으로서 동등하게 다루어져야 한다는 입장에서 보자면, 그러한 습관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 게임 이름의 첫글자는 모두 대문자로 표기했다.
서사시 ‘베어울프(Beowolf)’는 특정한 저자에 의해 쓰여진 작품이 아니라 민간 전승의 산물인데도 불구하고, ‘백년동안의 고독(One Hundred Years of Solitude)’처럼 제목 첫글자는 대문자로 표기한다. 마찬가지로 나는 ‘체스’가 특정 디자이너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이 아니라 민간전승의 산물이지만, ‘던젼즈 & 드래곤즈’같은 게임과 같이 제목 첫글자를 대문자로 표기하였다. ‘체스’라는 제목이 고유명사로 취급되는 것은 기묘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분명한 이유가 있어서 그러한 표기를 한 것이다.
또한 게임 제목이 처음 등장할 경우 가능한 한 디자이너의 이름을 처음에 표기하기로 했다. 디자이너 이름이 생략되어 있는 경우, 그것은 단지 내가 디자이너의 이름을 모를 뿐이다.


(역주) 번역에서는 게임의 명칭을 전부 작은따옴표로 둘러싸서 표기했다. 또한 게임의 명칭, 디자이너를 비롯한 사람이름, 회사명에 대해서는 한글로 표기하고 처음 나왔을 때 알파벳표기로 병기(倂記)하였다.
——– 원문은 여기까지


저자 소개
그렉 코스티캔. 1960년쯤 태어났음.
직업 게임 디자이너. 1976년 SPI에서 나온 북아프리카 4부작(North Africa Quad) 중 하나의 디자인을 담당하여 데뷔. 1975-1982년까지 SPI에서 일하고, 1985-1987년에 걸쳐 WEG(WEST END GAMES)의 과장을 역임했다. 현재까지 23개의 게임을 디자인/출판하였고, 그 이상의 게임 개발을 담당. 오리진(Origins) 상을 5회 수상.


주요 작품
팍스 브리태니카(Pax Britannica, VG), 오리진상 수상
웹 앤드 스타쉽(Web and Starship, WEG), 오리진상 수상
괴수정복(The Creature that ate Sheboygun, SPI), 오리진상 수상
마법의 대륙(Barbarian Kings, SPI)
죽음의 미궁(Death Maze, SPI)
스타워즈 RPG(Star Wars RPG, WEG), 오리진상 수상
파라노이아(PARANOIA, WEG), 오리진상 수상
툰(Toon, SJG)
이외에 하늘의 싸움(Air war, SPI), 로마 제국(Imperium Romanum, WEG), 킬러 앤젤(Killer Angels, WEG)등의 개발을 담당


소설
다른 날, 다른 던젼(ANOTHER DAY, ANOTHER DUNGEON) : 장편 팬터지
밝게 빛나는 대도시(BRIGHT LIGHT BIG CITY) : 아이작 아시모프 SF 매거진
1991년 2월호 게재


현재는 Crossover Technology사에서, 네트워크를 사용한 직접민주제에 의해 미국의 정책을 결정하는 거대 시뮬레이션 ‘Relnvent America’의 프로젝트를 맡고 있다.


저작권 관련 사항


‘말이 아닌, 디자인만이 게임을 말해 준다’는 원저자 Greg Costikyan씨로부터 비상업적 목적으로 사용될 경우에 한해 번역과 재배포에 관한 권한을 허락 받아 이민석, 홍순명이 한글로 번역했습니다.


‘말이 아닌, 디자인만이 게임을 말해 준다’는 Greg Costikyan이 판권을 갖고 있으며, 모든 권리는 예약되어 있습니다.


‘I Have No Word & I Must Design’ was originally wrote by Greg Costikyan. After hold all right restricted by non-commercial purpose, to translate and redistribute, translated by Minseok. Lee & Soonmyung. Hong.


‘I Have No Word & I Must Design’ is copyright 1994 by Greg Costikyan.
All right Reserved.


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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